향가


 

1. 향가의 종류

『삼국유사』 『삼국사기』 『증보문헌비고』 『고려사』등의 기록에 전하는 가요는 총 66편이다. 그런데 그 중에 가사가 전하지 않는 노래가 41편이고, 가사가 전하는 것은『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향가 14수와『균여전』에 있는 보현십원가 11수 모두 25수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향가는 일연과 균여에 의하여 수록된 일부에 지나지 않고 신라시대에는 더 많은 향가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2. 향가의 불교음악적 특징

이상보는 그의 저서『한국불교가사전집』에서 "불교가사의 연원은 범패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으며, "신라 향가는 모두가 불교 가요라 할 것이니, 당시의 사회상으로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등 삼국시대의 시가문학은 불교의 신앙생활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영향력을 입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1) {삼국유사}에 전하는 향가

 

(1) 혜성가

옛날 동해가의 건달바가 놀던 성을 바라보고,
왜군이 왔다고 봉화를 들게 한 동해가 있도다.
세 화랑의 산에 놀러 옴을 듣고 달도 빨리 그 빛을 나타내므로,
길을 쓰는 별을 바라보고 혜성이라 말한 사람이 있다.
아! 달이 아래에 떠갔도다.
보아라. 무슨 혜성이 있을 것인가.

 

(2) 제망매가

생사의 길은 여기에 있으매 두려워져서 나는 간다 하고 말도 못 다 이르고 가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같이 한 가지에 나고도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아! 극락세계에 만나 볼 나는 도를 닦아 기다리겠노라.

 

(3) 두솔가

오늘 이애 산화 불러 부린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을 받아 미륵좌주를 모시어라.

 

(4) 풍 요

오다 오다 오다 와도 서럽더라! 서럽다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 오다.

 

(5) 원왕생가

  달하, 이제 서방꺼정 가셔서

  무량수불전에 일러다가 사뢰소서.

  다짐 깊으신 존을 우사람 있다고 사뢰소서,

  아으, 이 몸을 끼쳐두고, 사십팔대러러 두 손을 모두와

  원왕생 원왕생, 그릴 원 이루실까.(양주동 풀이)

 

(6) 헌화가

  자주 빛 바위 끝에,

  잡으온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려하시면,

  꽃을 껏어 받자오리다.

 

(7) 안민가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는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하실는지, 백성은 다 알고 있습니다.

  구물대면서 사는 중생, 이를 먹여 다스리삽소서.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 것이여 할지 나라안 가짐을 알지어다.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 안이 태평할 것입니다.(박성의 풀이)

 

(8) 도천수관음가

  무릎을 꿇으며 두 손바닥 모아서 천수관음전에 비는 말씀 두나이다.

  천의 손과 천의 눈을 하나를 놓고 하나를 덜었삽기에 둘 없는 나인지라.

  하나는 가만히 고쳐주십시오.

  아! 나에게 남기신다면 놓으시는데 쓸 자비야 얼마나 클 것인가.

 

(9) 우적가

  제 마음에 형상을 모르려던 날

  멀리 ○○ 지나치고 이제란 숨어서 가고 있네

  오직 그릇된 파계주를 두려워할 짓에 다시 또 올라가리.

  이 쟁기를 사 지내곤 좋은 날이 새리러니,

  아으 오직 요만한 선은 아니 새 집이 되니이다.(양주동 풀이)

 

(10) 처용가

  서울 밝긔 달에 밤드리 노니다가

  두러와 자리 보곤 가라리 네히어라.

  둘은 내해었고 둘은 뉘해언고

  본디 내해다마는 앗아날 어찌 하릿고.(양주동 풀이)

 

 

 

1. 혜성가

  옛날 동해가의 건달바가 놀던 성을 바라보고, 왜군이 왔다고 봉화를 들게 한 동해가 있도다. 세 화랑의 산에 놀러 옴을 듣고 달도 빨리 그 빛을 나타내므로, 길을 쓰는 별을 바라보고 혜성이라 말한 사람이 있다. 아! 달이 아래에 떠갔도다. 보아라. 무슨 혜성이 있을 것인가.

 

이 곡은 융천사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삼국유사』에 융천사에 대한 기록이 없어 융천사에 대한 여러 견해가 분분하지만, 대체로 승려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 곡의 내용도 불교적인 노래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권제오 융천사혜성가 진평왕대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진평왕대에 삼화랑도가 풍악에 놀러 갔다가 혜성이 심대성을 침범하므로, 화랑들이 의아해하며 가기를 꺼려했다. 그런데 융천사가 이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 혜성은 즉시 소멸하고 일본병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니, 도리어 복되고 기쁜 일이 됐다는 것이다. 이 곡을 불가로 보는 근거는 곡의 작자가 승려라는 점과 가사 내용 중에 '건달파'가 등장한다는 데에 있다.

양주동은『조선고가연구』에서 "이 노래는 사뇌가를 신성시하고 주술시하는 전통적 유풍을 단적으로 보이는 좋은 예인 동시에 그 회학적 가풍과 교치한 직유법 등 사뇌가 중에서 가장 우수한 예술적 기교를 보이는 명작"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건달파'란 범어 Gandharva의 한역으로, 그 원의는 '후향'이나 '심향'이며, 팔부중신의 하나인 천악신의 명호이며, 배우를 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대개 서역풍속에 배우가 남의 집 음식 냄새를 맡아 가며 작악을 하며, 밥을 얻어먹은 데서 유래한다. 현행어인 '건달' 역시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음식의 향기만을 찾아다니는'(부작생업 지심음식지기) 부유의 사람을 칭한다"고 한다.

그러나『유마경』권제일에는 구마라집의 말을 인용하여 "건달바는 천악신이다. 십보산에 사는데, 천신이 음악을 하려고 하면 이 신의 몸에 징조가 나타난다. 그런 뒤에 천지로 나온다"고 정의하였다. 즉 건달파는 제석의 음악을 담당한 신으로서 지상의 십보산중에서 음식은 먹지 않고 향기만 먹고 있다가 천제가 작악시에는 나타났다가 끝나면 상천하는데, 항상 부처님이 설법하는 자리에 출연하여 정법을 찬탄하고 수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신이다. 이와 같은 뜻에서 박성의는『한국가요문학논과 사』에서 본가 전 4구 "동주를 수호하는 천중인 건달파가 음악을 하고 노는 잣(성)을 바라보고 왜군이 침입했다고 봉화불을 올린 갓(변)이 있도다"를 교묘히 표현한 대목이라 지적하면서, "건달파는 서역어와 불교어의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신라시대에는 서역어보다 불교어가 더 일반화되었으리라 믿어지므로, 여기에 등장하는 건달파는 환술을 가지는 배우가 아니라, 불법과 동주를 수호하는 악사로 본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노래는 "고대인의 종교적 신앙인 건달파의 전설이 결합된, 다시 말하면 신라불교의 특징인 불국토설과 호국사상이 융합된 사상에서 표출된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김운학은『향가에 나타난 불교사상』에서 융천스님은 왜병이 쳐들어와 아우성치는 소리를 천상의 악신인 건달바가 내려와 노래하는 아름다운 소리로 보았고, 이것은 마치 미혹을 돌이켜 오리를 보려는 것과 똑같다고 하였다. 즉 두려움을 멸식시키고 안락으로 보려는 소재주와 같다고 하였다. 혜성가는 결론적으로 불교적인 주술가로서 그 위에 토속신앙적 사상이 함께 습합된 토속민요조의 선율을 지닌 노래로 보인다.

 

2. 제망매가

  생사의 길은 여기에 있으매 두려워져서 나는 간다 하고 말도 못 다 이르고 가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같이 한 가지에 나고도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아! 극락세계에 만나 볼 나는 도를 닦아 기다리겠노라.

 

이 노래는『삼국유사』권오 월명사두솔가조 뒤에 기록되어 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버린 누이의 죽음을 애타하며 부른 노래이다. 한 가지 나무에 태어났다가 가을 바람에 흩어져 떨어져 가는 나뭇잎과 같이 한 혈육으로 태어났다가 행방조차 모르게 흩어져 사라져 가는 인생에 대한 무상함과 절망감을 느끼면서 아미타 정토로의 인도를 기원하고 있다. 김운학은 "이 향가는 생사의 무상함과 두려움, 유약한 인생의 절망과 고독 그리고 이 해결과 구원을 위한 미타찰토로 승화하여 평범한 인생의 상황 속에서 깊은 종교를 낳게 하고 있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하였다. 박성의는『한국가요문학론과 사』에서 "본가에서는 불교의 내영사상이 간곡히 나타나고 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권오 월명사두솔가조에는 "명우상위망매영재, 작향가제지, 몰유경표취지전, 비거향서이몰, 가왈"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월명사가 망매를 위하여 영재할 때에 이 노래를 지어 제사를 지냈더니, 갑자기 경표가 불어 지전이 서쪽으로 가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곡을 지은 월명사는 음악에 뛰어난 재질이 있는 승려로 보인다. 그는 항상 사천왕사에 거처했는데, 특히 적을 잘 불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제망매가는 음악성이 뛰어난 승려에 의하여 작곡된 곡으로서 재의식에서 불린 노래이다. 따라서 곡의 성격도 어린이나 일반이 부르는 향가와는 질적으로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가시의 내용이 무상한 인생과 형제간의 애정을 표현한 일반적인 내용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영생의 미타찰토에서 다시 만나기 위하여 불도를 닦으며 만나는 날을 기다리겠다는 불교의 내영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3. 두솔가

  오늘 이애 산화 불러 부린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을 받아 미륵좌주를 모시어라.

 

  35대 경덕왕 19년 4월에 해가 둘이 병행하여 일관에게 물었더니 연승을 불러 산화공덕을 하면 가양할 수 있다고 하여 조원전에 단을 청결하게 하고 왕이 청양루에 가행하여 연승을 기다렸다. 마침 월명사가 앞을 지나가므로 불러서 개단작계를 명하니 월명사는 신승은 국선의 도라서 향가는 알고 있으나 범성(범패)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왕이 향가라도 좋다고 하여 두솔가를 지었더니 …(중략)… 일괴가 즉시 없어졌다.

 

두솔가에 대하여 여러 학자들의 이설이 전하는데, 참고로 그 예를 보고자 한다. 먼저 양주동은 두솔은 미륵보살을 칭하는 것이므로, 일괴를 양키 위하여 미륵불을 요치하는 노래의 의로서 '선운두솔가'라 함이나, 수구의 산화창양은 본가가 원래 산화가로 지어진 것임을 말한다고 하면서 산화가는 단·장 2가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양주동의 주장에 대하여 김동욱은 산화가에 단 장 2가가 있었다는 것은 착오라고 반박하고, 산화가는 범음·석장·산화 등의 의식 절차에 있는 가영이며 무수하게 존재할 수 있고, 여기 도솔가는 미륵영청의 염화가로 믿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양·김 두 학자 모두 산화가에 대한 이견이 있을 뿐, 도솔가는 미륵보살을 요치하고 영청하는 노래로 보고 있다.

김운학은『향가에 나타난 불교사상』에서 두솔가 가시 중에 "곧은 마음의 명을 받는다"는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 곧은 마음이란 월명 스님의 일념된 마음의 힘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마음의 힘이 변괴된 해에게도 미쳐 사라지도록 한 능력의 마음이었다"고 하였다.

음악학자로서는 유일하게 두솔가를 논한 이혜구는 두솔가를 '도살푸리'로 읽어야 한다는 설에 따라 두솔, 즉 '도살'이란 말은 회생·환생·부활 등의 뜻이라 하였다. 따라서 '도살노래'는 "변사의 고경을 벗어나 회생의 환희를 읊어내는 소리이며, 또한 불의의 이변을 양제하고 본래의 원장으로 돌아갈 것을 희구하는 간절한 염원의 노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본가의 작자가 화랑도이면서 승려라는 것, 그리고 가시에 있는 '미륵좌주'란 말은 미륵불이나 미륵보살과 같은 순불교적인 표현이 아니고, 낭·불 융합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독특한 용어라 하여 화랑의 고유한 신관념에다 불교의 화생적인 미륵사상을 융합시킨 것이라 하고, 본가는 불교적인 성격이 있는 노래라고 보았다.

이렇듯이 이혜구는 도솔가를 현존하는 무속음악 '도살푸리'와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향가인 '사뇌가'를 '시나위'와 관계하여 연구 발표하기도 하였다. 현재 전통음악 중 기악곡으로 연주되고 있는 도살푸리와 시나위 곡은 경기 이남지방의 무속음악으로서 무가와 무무의 반주음악으로, 또는 소편성의 기악 합주로 연주되고 있다. 이와 같이 무속음악과 향가를 연계하여 연구한 것은 이혜구가 최초이다. 아직 확실한 증거는 제시되고 있지 않지만, 향가를 현존하는 전통음악과 연계하여 음악적 차원에서 연구한 사실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음악과 무속음악의 관계에 대해서는 뒷부분(삼. 불교음악의 전통음악적 전개)에서 언급하겠으나, 앞으로 향가와 무가 그리고 불교음악과의 관계는 계속 연구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도솔가는 작자와 가시 내용상으로 보아 불교적 성격이 강한 불교음악의 한 장르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곡의 성격은 이혜구의 주장과 같이 무속음악적 성격을 띠고 있는 가락으로 추측된다.

 

4. 풍요

오다 오다 오다 와도 서럽더라! 서럽다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 오다.

 

이 노래에 관한 기록은『삼국유사』권제사 양지사석조에 전한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당시의 승려였던 양지가 영묘사의 장육존상을 조성하면서 부른 노래이다. 이 노래에 관하여 박성의는 만성남녀들이 이토를 운반하면서 부른 민요라고 한다. 박성의의 논리대로 이 노래가 흙을 운반하면서 많은 남녀들이 함께 부른 민요였다면, 이 노래의 성격은 노동요풍의 민요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노동요란 일을 하면서 또는 일하는 광경을 묘사하여 부르는 민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노래는 당시에 널리 알려져 있던 민요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여러 사람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민요는 성격상으로 보아 당시 유행하고 있던 노래가 아니면 함께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박성의는 당시 영묘장육은 특히 유명해서 경성사녀가 서로 다투어 모여들었으므로, 이 노래가 유행한 것으로 보았고, 이 곡은 당시 민요로 유행하던 것이 채록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 노래는 집단적인 노동요로서의 민요이기 때문에, '오다 오다 오다', '서럽다 서럽다'와 같이 민요형식이 가진 정조유출의 유지를 위한 반복의 형식을 취한 것을 하나의 특색으로 보았고, 반복적인 음악성과 4구 1연으로 이루어진 이 형태는 후대 민요 형식의 원형이 되었다고 논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이 노래의 가락(율)은 노동을 하며 부르는 단순한 곡이었을 것이며, 불심을 유발하는 불교적 분위기에 알맞는 가락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곡의 형식은 가사내용이 짧고 단순한 것으로 보아 계속 반복하여 부르는 돌림노래풍의 곡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곡에 관하여 김운학은 "모든 남녀가 정에 든 상태에서 법에 맞게 조상하고 있는 양지 스님께 공덕을 짓기 위하여 한 줌의 흙을 쥐고 올라오는 표상을 읊은 노래"라고 하였다.

이 곡에 등장하는 양지는 신라의 명승으로서 선덕여왕대의 대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향가 풍요는 서동요·혜성가 다음으로 오래된 향가로 전한다.

 

5. 원왕생가

  달하, 이제 서방꺼정 가셔서

  무량수불전에 일러다가 사뢰소서.

  다짐 깊으신 존을 우러러 두 손을 모두와

  원왕생 원왕생, 그릴 사람 있다고 사뢰소서,

  아으, 이 몸을 끼쳐두고, 사십팔대원 이루실까.(양주동 풀이)

 

위의 곡은『삼국유사』권제오 광덕·엄장조에 기록되어 전하는데, 곡의 내용은 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서방정토에 왕생함을 소원하는 노래이다. 노래 가사 중에 불교와 관계되는 것은 원왕생, 무량수불, 세존, 광덕과 그의 처, 그리고 사십팔대원을 들 수 있다. 이 곡은 불교가 생활화된 문무왕대에 사문인 광덕과 엄장이 수도하여 극락(안양)으로 갔다는 설화와 관련된 노래로서 아미타사상에 근원을 둔 노래로 보고 있다.

원왕생가의 작가에 대해서는 광덕으로 보는 설과 그의 처로 보는 설, 그리고 원효가 지었다고 하는 설, 또는 전승가요설 등이 있는데, 곡의 작자가 누구든 관계없이 가사의 내용상으로 보아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한 정토사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종우는『향가문학론』에서 원왕생가는 불교가 일반화된 문무왕대에 민간에 유포되었던 정토사상을 대변하는 곡이라고 하였으며, '원왕생'의 의미가 보살의 화신인 그 자신이 서방정토에 오르기를 희구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왕생을 서원하고 대변해 준다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달'은 '광덕'으로 보고, 노래 내용이 먼저 간 자기 남편(달)이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달에게 절실히 원하는 한 여인이 있다는 것을 무량수불 전에 사뢰어 달라는 것이니, 이 곡의 작자를 광덕의 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기동은 "신라가요에 나타난 불교의 서원사상"이라는 논문에서 '원왕생가'를 사문 광덕이 지은 것으로 보았고, 균여의 '보현십종원왕가'와 함께 아미타불의 신앙생활이 기초가 된 정토사상과 직결된다고 논하였다.

무량수불은 서방 극락정토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이다. 아미타불은 오랜 과거세에 법장비구로 있을 때, 세자재존불의 감화로 210억이나 되는 많은 국토에서 이상향의 국토를 세워 자기와 남들이 모두 함께 성불하기를 기원하면서 48가지의 대원을 세우고 다시 많은 세월 동안 수행을 한 끝에 성불하여 아미타불이 되어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장엄하고 있는 부처님이다. 본가의 가사 중에 '왕생하게 하소서, 왕생하게 하소서'(원왕생, 원왕생)라고 하면서 극락정토에 왕생하게 해달라고 비는 대상은 바로 이 아미타불이다. 따라서 이 노래는 기원가의 특성을 나타내 주고 있는 불가로 볼 수 있다.

윤영옥은 그의 논문 "원왕생가"에서 미타신앙의 근본사상에 원왕생가를 비유하면서 인간의 비원이 깃들어 있는 애조를 띤 노래이며, '제망매가'와 같은 부류의 곡이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원왕생가'는 서방 극락정토를 주관하는 아미타불께 서방정토의 왕생을 기원하는 불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곡의 성격은 서원가의 특성을 지닌 남도 계면조풍의 가락이었거나 메나리조의 특징을 지닌 선율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6. 헌화가

  자주 빛 바위 끝에,

  잡으온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려하시면,

  꽃을 껏어 받자오리다.

 

이 노래는 전체가 4구로 된 민요조의 형식을 띠고 있다. 이 시에는 노인 암소 꽃  여인이 등장하는데, 노인·꽃·암소의 상징문제가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논의되어 왔다. 헌화가를 불가로 보는 이유는 이러한 등장인물에 대한 평가에서 비롯된다.

김종우는『향가문학논』에서 남을 위하여 절벽 위에 있는 꽃을 꺾어 주며 난행을 능히 행한 노인을 '보살의 화신'으로 보았고, 또한 불가에서 선승을 목우자로 보고 있는 점을 들어 소를 잡고 가던 노인을 잃었던 자기의 심우를 붙들고 가는 선승으로 보고 있다. 자기의 법열을 즐기면서 본가향으로 돌아가는 선승을 상징하는 노인, 그가 수로부인의 애원에 심우의 고삐를 놓치더라도 꽃을 꺾어 바치겠다고 하였으니, 이는 진솔하고 꾸밈없는 인간성의 발로이며, 그 노인은 남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숭고하고 거룩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김종우가 노옹을 목우 선승으로 본 것에 대하여 김동욱은 즉흥가요로 보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박성의는 김종우의 주장에 대해 비약이 심하다고 비판하면서도, 그러나 불교의 목적이 개인의 완성과 지상의 예토를 정화하여 불국토를 만들어 자타가 함께 즐거움을 누리는 데 있음(공락)을 예로 들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절벽에 피어 있는 꽃을 꺾어서 구하는 자에게 바치는 것은 그러한 공락을 위한 행위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상구보제, 하화중생'의 이념으로 자리·이타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도록 추구하는 것이 개인의 완성이자 불국토를 건립하는 것이므로, 애끓는 여인의 원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결코 선승의 도가 추락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구도와 수도가 선승이 해야 할 일이라면 갈구하는 자의 마음을 충족시켜 주는 일이 무엇보다 대승적이고 이타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이 '헌화가' 속의 노옹이 절대로 선승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는 형편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삼국유사』의 본문에 '노승'이 아니고 '노옹'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작자는 승려가 아니고, 가사 내용도 즉흥가요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외에도 가파른 벼랑의 꽃을 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경지를 극복하여 사랑을 쟁취하는 것이라고 보는 설 등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다.

현존하는 향가가 불교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은 학자들 대다수의 공통적인 견해이다. 그렇다면 노옹이 지나가다가 처음 본 여인을 위하여 사랑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잡고 가던 소를 놓고 꽃을 꺾으러 갔다는 해석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노옹이 여인을 위해 부른 단순한 사랑의 노래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김종우의 주장처럼 선승을 목우자로 보고, 선승인 노옹을 수로부인의 애원에 심우의 고삐를 놓치더라도 벼랑에 핀 꽃을 꺾어 바치겠다는 진솔하고 꾸밈없는 인간성과 남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숭고하고 거룩한 정신의 소유자로 보는 관점을 바탕으로 하고, 그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노인을 보살의 화현인 선승으로 배대하고 수로부인은 고뇌에 가득 찬 중생에 배대하여, 보살이 자신의 마음을 잡아 부처가 되기를 추구하지만(상구보제), 한편으로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고뇌하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성불을 미루고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그들을 보살피겠다는 의지(하화중생)를 노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김광순의 논문 "헌화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논문에서는 노옹을 불가에서의 '심우', 즉 '심우'나 '불을 깨달은 자'로 보아야 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근거를 십우도에 대한 대비에서 찾고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헌화가는 불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시의 내용으로 보아 서정적인 신라사람들의 소박미와 아름다움에 대한 숭고한 표현이 깃든 노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시의 구조가 4구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민요풍의 노래로 보인다.

 

7. 안민가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는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하실는지, 백성은 다 알고 있습니다.

  구물대면서 사는 중생, 이를 먹여 다스리삽소서.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 것이여 할지 나라안 가짐을 알지어다.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 안이 태평할 것입니다.(박성의 풀이)

 

안민가는『삼국유사』권제이 경덕왕 충담사조에 실려 있는 노래다. 이 노래는 남산의 미륵세존에게 차공양을 올리고 오는 충담이라는 승려에게 왕을 위한 노래를 지어 달라고 권유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노래의 내용은『인왕경』과『금광명경』에 들어 있는 정법사상과 호국불교적 사상이 근본을 이루고 있다.

가사 내용 중에 특히 주목이 가는 부분은 승려의 입장에서 왕에게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하라고 권고하는 대목이다. 충담스님은 이 노래를 통해 각자가 자신의 본분을 다하면 나라는 저절로 잘 다스려질 것이라는 진리를 설하고 있다.

안민가를 지은 충담사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이견이 있다. 박노준은 "안민가에 관계된 몇 가지 문제"에서 본가의 작자인 충담사의 전신은 국선지도였다고 한다. 그러한 그가 당대의 역사적 환경의 영향을 받아 승려가 되었으며, 승려가 된 뒤에도 현실에 참여하는 우국시인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내용의 해석에 있어서도 권력사회의 혼잡을 바로잡기 위한 초당적인 견해를 담고 있다고 단정하고 있다. 즉 나라가 태평하지 않은 원인은 군왕과 신하와 백성이 제각기 자기의 본분을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직언한 내용으로 풀이하였다.

이에 대하여 박성의는 안민가의 작자는 국선지도·승려임은 물론이고, 오악산신 등의 현신이라고 하며, 중국 고대의 유학적·민속적인 천명사상의 발현 등을 고려할 때, 본가는 유·불·선·무의 화합적인 사상에서 염출된 시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최철의 논문에서는 안민가의 생성동인은 시대적·사회적 배경으로 보아  당시의 비안민적 상황에 있었다고 하고, 이 노래는 왕에게 치국의 도리를 밝힌 것으로, 작자인 충담이라는 이름조차도 이 노래와 같은 상징적인 의미의 이름이라고 하였다. 향가는 이렇게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배경을 달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어찌되었든 안민가를 지은 사람으로서 충담이란 승려가 등장하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왕의 권유에 따라 권고적 입장에서 노래를 지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불교의 입지와 불가의 위치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아 이 곡의 성격은 민요와는 달리 승려가 지은 불가풍의 선율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8. 도천수관음가

  무릎을 꿇으며 두 손바닥 모아서 천수관음전에 비는 말씀 두나이다.

  천의 손과 천의 눈을 하나를 놓고 하나를 덜었삽기에 둘 없는 나인지라.

  하나는 가만히 고쳐주십시오.

  아! 나에게 남기신다면 놓으시는데 쓸 자비야 얼마나 클 것인가.

 

이 곡은 곡명에서 말해 주듯이 불가임을 알 수 있다. 곡의 내용은 경덕왕 때 한기리 여자 희명의 아들이 실명하여 그 어머니가 분황사에 있는 천수대비 관세음보살 전에 이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 아들의 눈이 다시 밝아졌다는 것이다.

이 노래는 관음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들의 눈을 고치기 위한 어머니의 정성어린 기도 모습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천수관음전에 빈다는 내용이 불교적 기도의 의식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재선은 "신라향가의 어법과 수사"라는 논문에서『법화경』에 있는, "고뇌에 싸인 중생이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보살이 즉시 그 음성을 관상하여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에 관세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고뇌중생 일심칭명 보살즉시 관기음성 개득해탈 이시명관세음)라는 경문을 인용하고, 이 노래에 불교의 민간신앙적 요소가 나타나 있음을 강조하였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 구고구난의 주체이며, 누구든 관세음보살을 향해 일념으로 간절하게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면 언제 어느 때고 고통을 없애 준다고 하여 불교도들이 가장 많이 신봉하는 대중성을 지닌 보살이다. 관세음은 중생들이 간절하게 찾는 소리를 듣고서 수없이 많은 손으로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 노래를 지은 작자에 대해서는 많은 이설이 있다. 희명이 지었다는 설(양주동)을 비롯하여 {삼국유사}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여 5살짜리 맹아가 지었다는 설(양재연), 그리고 어떤 승려가 만들어 놓은 사뇌가 형식의 기도문이라는 설(조동일), 희명이 즉흥적으로 지어 부른 것이나 뒷날 작품화된 노래라는 설(박노준) 등이 있다.

논자의 생각으로는 이 노래를 다섯 살난 아이가 지어 불렀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이 노래는 10구체의 사뇌가 형식을 취하고 있어 어린이가 노래로 지어 부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가사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기교나 수사법을 강조하고 있지 않은 점 등을 보아, 아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한 어머니의 간절한 발원의 가락을 아들이 따라 부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게 본다면 실명한 아들을 둔 어머니가 그 아들을 위해 관음대비전에 지어 부른 노래는 과연 어떤 율을 갖추고 있었을까? 평범한 아낙네(희명)가 지어 부른 이 노래는 당시의 순수한 토속적인 민요풍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신라지방(경주)의 토속 민요풍(메나리 가락)에 속하는 곡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노래의 성격은 애원과 바람이 담긴 처절한 가락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향가의 종류는 논자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승려들이 지어 부른 것과 다른 일반적인 향가에 속하는 것이다.

 

9. 우적가

  제 마음에 형상을 모르려던 날

  멀리 ○○ 지나치고 이제란 숨어서 가고 있네

  오직 그릇된 파계주를 두려워할 짓에 다시 또 올라가리.

  이 쟁기를 사 지내곤 좋은 날이 새리러니,

  아으 오직 요만한 선은 아니 새 집이 되니이다.(양주동 풀이)

 

이 노래를 지은 영재는 향가를 잘 부르는 승려였다고 한다. 이 노래는 흉악한 도적의 마음을 감동시켜 부처님께 귀의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노래의 교훈성이 돋보이고 있다. 이 노래를 불가로 보는 것은 승려가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 것과 악업을 짓는 도적들을 선행하도록 선도했다는 점이다.

위의 가사 중에서 '숨어서 가고 있네'란 속세를 떠나 출가하는 것을 뜻한다. '쟁기'는 도적들의 위협과 무기를 말하고 있으나, 승려인 영재는 오히려 '좋은 날', 즉 내세로 전의시키고 있다. '새 집', '좋은 날' 등은 내세의 세계, 즉 극락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권제오 영재우적조에 영재에 대한 설명과 곡에 대한 기록이 전하는데,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영재는 재물에 탐이 없고 향가를 잘 하였다고 한다. 그의 나이 90이 되어 세모에 남악(지리산)에 들어가려고 대현령에 이르렀는데, 도적 60여 명이 나와 칼을 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영재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태현하니 오히려 도적들이 이상히 여겨 이름을 묻기에 영재라 하였더니 도적들은 평소에 그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향가를 지어 부르라고 요구하였다. 영재가 즉시 우적가를 지어 불렀더니 도적들이 노래에 감동하여 비단 이단을 주었으나, 영재는 웃으며 재물을 탐내는 것은 지옥에 갈 근본이라고 하면서 그 비단을 땅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도적들은 그 말에 더욱 감동하여 모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여 머리를 깎고 영재의 신도가 되어 지리산에 같이 들어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영재는 향가를 지어 불러 도적들을 부처님께 귀의하도록 했다. 영재의 향가 실력을 이미 도적들까지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에 향가가 어느 정도로 유행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특히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하여 향가가 승려들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불렸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산 속에 사는 도적들까지도 향가를 잘 부르는 승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사회 전반에 유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더욱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불교가 생활 그 자체였던 당시에는 불교음악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생활 속에서 불린 노래들이 모두 불교음악적 성격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영재가 부른 우적가가 승려가 부른 노래였기 때문에, 도적들이 귀의했다고만은 볼 수 없다. 도적들도 노래 속에 담겨 있는 불교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를 따라 출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 살펴본 우적가는 전래되는 향가 중에서 교육적 내용을 담고 있어 우리에게 주는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노래로 인하여 당시 향가의 사회적 위치를 알 수 있다. 도적들까지도 향가를 좋아했던 이 시절에는 불교음악이 사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민중의 생활 속에 그들의 삶과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노래들이 바로 불교로 인하여 새롭게 전개된 한국적 불교음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곡은 향가를 잘 불렀던 영재가 부른 노래였고, 도적들이 감탄할 만큼 잘 알려져 있던 것으로 보아 당시에 유행하던 민요조의 곡으로 보인다. 그러나 곡의 성격상 일반인은 쉽게 부를 수 없는 선율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기 때문에 영재의 노래를 들은 도적들이 크게 감탄했던 것으로 보인다.  

 

10. 처용가

  서울 밝긔 달에 밤드리 노니다가

  두러와 자리 보곤 가라리 네히어라.

  둘은 내해었고 둘은 뉘해언고

  본디 내해다마는 앗아날 어찌 하릿고.(양주동 풀이)

 

이 노래는『삼국유사』권제이 처용랑 망해사조에 그 기록이 전한다. 이 노래는 불가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이나 양주동은 불교와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처용은 당초 일이양인물로서 그 출현한 때가 일식 직후이므로 당시엔 동해용자, 후세엔 일식신 '나후'로 인정되었는데, 나후는 일방 인욕보살의 일인 '나후라'와 관계되므로 그의 인욕밀행으로서 예의 유사소재설화가 형성된 듯하다.

 

양주동은 일식신을 나후라로 보고, 그의 밀행으로 인해 {삼국유사}의 설화가 형성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처용가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다양하다. 박성의는 {삼국유사}의 설화와 구나 의식인 처용무를 고려가요로서 알려진 처용가로 보나, 무가 내지 주가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서, 다른 학자들의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바와 같이 처용가는 처용이 간부를 맞이한 처를 질책하지 않고, 오히려 탈을 쓰고 춤을 추어 간부였던 역신에게 관용을 베푼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로써 감격한 역신은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맹세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처용의 화상이 벽사진도의 도구로 신라말과 고려초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었고, 고려 때에는 궁정의 구나의식과 직결되어 무용(처용무)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악무와 가사는 역신을 쫓아내는 극적인 형식을 갖춰 조선 초기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이러한 역사를 거친 처용무는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는데, 처용무가 불교와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안확은 "조선음악과 불교"라는 논문에서 처용가가 곧 불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처용과 관련된 신화의 원문에서 운무가 자욱하고 암흑천지가 됐다고 하는 사실과 처용가의 나후덕이란 어구에서, '라후덕'은 밀교와 관련된『대일경소』에서 "라후는 교회식신"(나후시교회식신)이라고 하거나, "라후계도가 별에 숨어서 해와 달을 조작하여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을 식이라고 하며, 그래서 식신이라고 부른다"(나후계도차성재은위불견봉일월즉식호왈식신)고 하는 경문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처용가가 만들어졌을 당시에 일식현상이 있었으며, 그러한 일식현상을 보고 불경 속에 나오는 나후라신의 행위로 간주하여 불교와의 관련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당유지가 번역한『금강광염지풍우타라니경』에 보면 풍·우·운·애·뇌·벽 등은 모두 용이 부리는 조화인데, 이때 진언을 외우고 불사를 만들면 그러한 조화가 금방 멈춘다고 한다. 처용가가 지어졌을 당시에 일관이 암흑세계가 된 이유는 용이 부린 조화 때문이라며 불사를 창건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이때 보란 듯이 날이 밝아졌다고 한다. 또 즉시 용을 위해서 망해사를 짓게 했는데, 이 역시 불경을 근거로 한 설이다.

셋째,『동국세시기』상원조에 보면 "라후라직성의 연령에 이른 남녀가 추영(처용)을 만들어 '처용 운운' 하였다"(남녀년치나후직성자조추영방언위지처용운운)고 하는데, 이 풍속은 지금 경성에서도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다. 즉 연기가 나후직성에 당한 자는 제융 즉 처용을 만들어 원방에 방기하야 액운을 면한다는 습관이 있다. 여기서 나후직성을 처용직성이라 하며, 또한 처의 의미를 은이란 자로 볼 때는 처용이 용모를 은익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경에서 라후신이 '은위불견'이라고 한 말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이상과 같은 견해에 의해 보면 처용가는 불교 설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향가라고 말할 수 있다. 처용가의 음악적 성격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처용가를 부르며 춤을 추어 역신을 쫓아내었다고 본다면, 이 곡은 무가 내지 주술가의 성격을 띤 토속민요조의 가락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