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봉 석상훈 스님 인터뷰


불교음악 '범패'의 주춧돌 석상훈 스님

새벽 산사에 울려퍼지는 바이올린 소리


불락사 법고전 앞에 선 상훈 스님. 불교음악 보급에 목숨을 걸었다는 그는 흐트러진 마음을 잡기 위해 바이올린을 자주 켠다고 한다.
새벽 3시, 절 근처의 계곡에서 범종이나 염불 소리가 아니라 스님이 켜는 바이올린 소리를 듣는다면 그 기분은 어떨까.
‘자신을 항상 땡중이라 부른다. 그는 통상적 승문의 계율에 벗어나 있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많은 장점이 있다. 우선 마음과 손씀새가 호방하고 앞뒤가 없다. 다정다감하고 솔직하다. 그리고 그는 울적할 때마다 바이올린을 켠다.’

도올 김용옥씨가 그의 베스트셀러 시집 “이 땅에 살자꾸나”에서 상훈 스님을 표현한 말이다. 도올이 시로 쓴 ‘삼신산 한귀팅이 광승의 바이올린’의 광승도 바로 상훈 스님을 이르는 말이다. 도올이 지난 86년 양심선언을 하고 고려대 철학과 교수직을 버리고 사라진 뒤 쌍계사 말사인 국사암에 잠시 기거할 때 상훈 스님을 만났던 것이다.

피아골 불락사(佛樂寺)의 주지 석상훈 스님. 쌍계사의 포교와 호법을 맡고 있는 그는 지금도 바이올린과 거문고·기타 등 못다루는 악기가 없을 정도다. 불락사라는 이름도 불교음악의 줄임말이다.
“바이올린 켜는 중이라고 도올의 시집이나 모 월간 음악 전문지에 실리는 바람에 조금 유명세를 타기는 했지만 음악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끄럽습니다. 또 수도자로서보다 ‘딴따라’ 혹은 ‘건달’에 가까우니 사실 용맹정진하는 스님들께는 좀 미안하지요. 하지만 불교음악, 즉 범패의 중흥에 대해서는 제 목숨을 걸고 할 겁니다.”

‘건달’은 불교용어인데 ‘불교음악의 신’을 이르는 말이라며 호탕하게 웃는 상훈 스님은 이따금 세인들의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그의 범패 중흥에 대한 추진력 하나는 아무도 못말릴 정도다.

그가 막 출가했을 무렵의 에피소드 하나. 그가 출가한 것을 알고는 대구에서 아버지가 데리러 왔다. 그러나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기독교 신도였던 아버지에게 “먼저 삼배를 올리시오”하고 윽박질렀다.

그후 아버지는 쇼크로 쓰러지기도 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또 절 아래에서 큰 염주를 하나 목에 걸고 찾아왔지만 박대하는 바람에 울면서 돌아가야 했다. 그는 “지금 생각하니 내 입장만 생각한 것 같다”며 이미 고인이 된 어머니를 떠올리는 듯 잠시 말문을 닫았다.

현 조계종 총무원장인 오고산 스님의 상좌인 그는 진감국사가 옥천사(쌍계사의 전 이름)를 일으키고 불교음악인 범패음곡을 대중들에게 가르쳤던 팔영루의 진면목을 되살려 ‘염불원’을 짓는 게 소망이다. 총림에는 강원과 선원, 율원이 있지만 그와 더불어 지금은 흔적도 없는 염불원을 되살리려는 것이다.

“범패는 한마디로 종합예술이지요. 쌍계사의 팔영루가 염불원의 형태지만 그 명맥이 끊겼습니다. 그곳에서 악가무를 가르쳤지요. 중국인이 쓴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 스님들은 모두 승무·바라·법고 등을 했습니다. 단소나 대금 등 기본적으로 악기를 다룰 줄 알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의 국악이나 민속음악도 거의 범패의 영향 아래 생겨난 것입니다. 현재의 찬불가는 그레고리안 찬트를 베낀 것에 가깝지요. 이제 찬불가도 국악의 형태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상훈 스님과 국악계의 인연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어져왔다. 88년 서울과 부산에서 열린 ‘박범훈 창작발표회’ 무대에 직접 출연했으며, 국립무용단의 무용극 “하얀 초상” 공연에도 직접 출연해 이차돈이 절규하는 장면에 맞춰 염불을 해주었다.

또 일본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음악의 만남’을 주제로 한 연주회에서 범패의 일부를 연주하기도 했다. 해마다 그의 주도로 열리는 불교음악제(불락사)에 등장하는 기라성 같은 국악인들의 면모를 보면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알 수 있다. 불교음악제에 참석하지 못하는 국악인들은 제대로 행세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특히 그와 고인이 된 안비취 선생의 인연은 빼놓을 수 없다. 안선생은 생일 때면 언제나 스님을 찾아왔으며, 그 또한 속세의 연을 끊고 입산했으면서도 안비취 선생의 양아들이 된 것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불락사 입구에 안비취 선생의 추모탑과 묘가 있고 대웅전 격인 법고전에 안비취 선생의 영정을 모셔놓은 것만 봐도 선생에 대한 애정이나 국악에 대한 그의 열정을 읽을 수 있다.

“빈 손으로 돌아가겠다”

그는 지금도 안비취 선생이 “무대에 나가면 나도 떨린다. 대중을 무서워하라. 그런 마음이어야 한다. 눈을 내려감지도 말고 높게 쳐들지도 말라”고 일러준 교훈 하나를 늘 잊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선생님의 작은 딸은 미국에 있어도 자주 연락 오지만 큰딸은 서울에 있으면서도 종교적인 문제 때문인지 묘지에도 오지 않는다”며 씁쓸해 한다.

그러나 그도 스님인지라 문화활동을 하면서도 더이상 벗어날 수는 없다. 고산 스님에게 경계의 말씀을 많이 들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아무리 중으로서 불교음악을 하지만 아마 장가를 가도 수십번을 갔을 정도로 흐트러지기 쉽다”며 호방하게 웃었다.

불교음악의 정신적 지주인 박범훈 교수와 절친한 그는 최근 10만평에 달하는 불락사를 종단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국악예술고의 불교음악 연수센터 부지로 3천평을 희사한 석상훈 스님. 누가 뭐래도 그는 범패 중흥의 주춧돌이다.
수도자라기보다 문화기획자 혹은 지휘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그는 “결국 빈손으로 쌍계사로 돌아가지 않겠느냐”며 올 초파일에 열리는 불교음악제 준비를 위해 바쁘게 자리를 떴다.


그는 절 아래마을 사람들에게 쌀을 퍼다주고, 옷가지를 구해다 입히고, 취업을 알선해 주는 일에도 열심이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이 거듭될수록 건성으로 바뀌는 것을 느낀다고 한다. (어느 잡지에서 한 토막)